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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정보학과 -재미학

국내 첫 '여가정보학과' 개설 명지대 김정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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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일 근무제’ 시행이 논란을 빚고 있는 가운데 명지대 기록과학대학원에 국내 최초로 석사과정의 ‘여가정보학과’가 신설돼 내년 1학기부터 신입생을 모집한다. 이 학과는 여가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조언하는 여가기획자(Leisure Planner)와 여가산업의 큰 틀을 짜는 여가비즈니스설계자 육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학과의 김정운 주임교수(39)는 “여가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사회적 준비없이 주5일 근무제를 맞게되면 가족구성원간의 갈등부터 시작해 각종 사회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면서 “여가활용과 관련해 사회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인, 특히 남자에게는 술 먹고 2, 3차까지 가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놀이문화’가 없습니다. 또 집단으로 엮였을 때는 호기롭게 행동하지만 일대일로 대면해 놀거나 즐기는 방법은 전혀 모릅니다. 이미 IMF 이후 실직자들의 사례에서도 드러났지만 주5일제가 돼서 가족들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이런 일대일 대면 놀이문화에 익숙치 못한 한국의 부부, 부모 자식들이 겪게될 갈등, 특히 가장들의 부적응증은 불을 보듯 훤합니다.”

김 교수는 이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여가이용시간의 주체를 철저히 ‘가족’으로 설정한 프로그램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교과과정 내에서 ‘여가 심리’와 ‘여가 정보관리’가 핵심으로 강조된다.

“지 금까지 여가활동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격이나 연령대, 가족구성 내용에 따라 어떤 여가활동에 더 흥미를가질 수 있는지 유형적 분류가 가능합니다. 개인의 인성을 분석한 뒤 그런 유형별 접근을 통해 개개인에게 적절한 정보를 주면 여가활동이 다채로워질 수 있죠.”

81학번으로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특히 한국사회 386세대들의 여가에 대한 태도를 관심 연구주제로 삼고 있다.

“386세대 대부분이 사회운동을 하던 젊은 시절의 금욕주의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서도 ‘룸살롱’같은 기성의 놀이문화는 그대로 답습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입니다. 이런 태도로 놀이문화 변화를 가로막는 주범세대가 되고 있어요.”

학과 안내 사이트는 www.leisure-studies.com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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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msm7373&logNo=10085217183
여가학 VS 여가문화학 Class / ★Leisure

2010/04/27 02:16

복사 http://blog.naver.com/smsm7373/10085217183

첨부파일 (1)

여가문화학회 2005년도 제 1차 콜로키움 자료입니다.
여가학인가, 여가문화학인가! - 김영순(콜로키움 위원장, 인하대학교 사회교육학과 교수)

 

 

1. 첫 번째 이야기: ‘여가’를 바라봄


놀 이를 학문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학’이란 원래 의미와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는 면에서 ‘놀이’를 학문으로, 여가학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또한 꽤나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한국여가문화학회 콜로퀴움은 한국 여가문화학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 될 것이다.(본 학회의 콜로퀴움은 올해 2차로서 지난해는 ‘주5일제와 여가’란 주제로 진행되었음).

 

우 리 한국에서는 2002년에 들어 한국여가문화학회가 창립되고 본격적으로 ‘학’으로서 여가 혹은 여가문화에 대한 접근의 통로가 열린 셈이다. 물론 본 여가문화학회 이전에도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스포츠학, 청소년학, 관광학 관련 학회에서 여가에 대한 논의가 줄곧 있어왔다. 그런데 한국여가문화학회가 조직됨은 이렇게 관련 학회에서 각개전투식으로 연구되어 왔던 ‘여가’를 이제 통합적으로 한편으로는 분석적으로 깊이는 물론 외연의 확장을 도모하겠다는 야심 찬 학문적 도전으로 평가된다.

그 렇다면 3년간의 짧은 기간동안이나마 여가문화학회에서 논의된 여가에 관한 학문적 접근을 살펴  보는 것은 현재 여가문화학회의 정체성은 물론 어떻게 여가 혹은 여가문화를 연구해나갈 것인가 는 지표를 제공하게 된다. 1차 콜로퀴움과 연차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연구들은 거의 여가문화학회 학회지인 <여가학 연구>에 수록되어 있다. 이 학회지에서 어떤 이론적인 논의가 이루어 졌는가는 한국 여가학의 테두리 및 출발점을 가름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다.

 

그렇다면 한국여가문화학회의 화두인 여가는 무엇인가? 여가의 다양한 개념, 다의적 의미에서 비롯되었는지, 혹은 다양한 학문적 배경에 의해서인지 여가에 대한 정의 또한 다양하다. 크리스 로젝(1995)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여가>의 서론에서 듀마제디에 등을 인용하면서 여가에 대한 정의를 ‘자유’, ‘선택’, ‘삶의 만족’ 등과 관련지으려는 시도가 대다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언급은 <여가학 연구> 1권 1호부터 2권 2호까지 총 5권에 수록된 29편의 논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논문제목 (1권 1호: 2003년 3월)

발표자

<특별기고> 에듀테인먼트와 원융회통의 전통

이어령(상임고문)

<특별기고> 행복한 사람들, 그리고 여가에 관한 그들의 이해

한준상(학술위원장)

진지한 여가활동 몰입과 가족여가갈등에 관한 연구

문숙재, 최자경

여가생활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가?

이누미야 요시유키,

김정운

도시근로자가구의 여가소비지출 분석

차경욱

핵가족 부부의 가족여가활동시간에 관한 연구

윤소영, 정유희

바둑의 실력은 어떤 요소로 구성되는가?

최일호

논문제목 (1권 2호: 2003년 7월)

발표자

여가와 삶의 질: 중년부부를 중심으로

김정운, 이장주

가족여가의 활동유형 및 본질에 대한 연구

윤소영, 윤지영

한국문화에서의 여가의 의미

최상진, 김기범, 최정인

학제간 여가연구를 위한 경제사회학 접근

최석호

가족단위 여가활동 참여가 가족기능에 미치는 영향: 주 5일 근무제 실시집단을 중심으로

홍성화

ETLA(Education Through Leisure Activity)로서의 ETC(Education Through Cinema): 'Edutainment'로의 영화읽기

강규형, 윤희윤

초등학생 여가에 대한 문화자본론적 고찰: 초등학교 3,4학견 학생들의 방학 중 여가활동의 계층적 차이를 중심으로

최샛별

논문제목 (1권 3호: 2004년 2월)

발표자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 즐거움

민성길

인터넷 여행자 커뮤니티에 관한 탐색적 연구

윤지환, 박상이

가족과 여가

최석호

광화문의 소리풍경(soundscape)과 소리투쟁(conflict of sounds)에 관한 시론

박성일

여가경험의 지각조건과 심리적 요인

허태균

논문제목 (2권 1호: 2004년 7월)

발표자

주 5일제와 스포츠 담론

이철원

북한이탈주민의 라이프스타일: 일상과 소비의 양 측면에서

채정민, 심진섭, 이종한, 허태균, 한성열

주 40시간 근무제 도입에 따른 여가활동 실태조사

박영대, 김정운, 이장주, 박정열

실패한 여가의 심리학적 의미: 무슨 여가를 왜 실패하는가?

허태균, 박정열

부 5일제와 여가정책

김정운, 최석호, 이장주

논문제목 (2권 2호: 2004년 11월)

발표자

상호문화주의 한국 일본 및 아시아 근대 연극사 비교연구: 유럽 연극 수입 양상을 중심으로

장원재

로또 소비자들의 구매 동기가 로또 추첨 결과에 따른 정서적 경험에 미치는 영향

박유진, 김재휘, 김형일

자아존중감 및 여가활동 참여와 주관적 안녕감의 관계

차경호

주 5일 근무제와 가족복지문제

윤소영

웰빙과 웰빙 산업

신철호, 한지연


위에 제시된 논제들을 중심으로 따져 보았을 때, 철학, 심리학, 사회학적 여가의 접근은 물론 주5일제와 여가에 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여가의 학문적 테두리가 얼마나 광대한가를 알 수 있다. 3년여의 짧은 기간동안 한국여가문화학회에서의 학문적 논의는 여가 이론의 수입과 무조건적 적용이 아닌 한국적 여가학을 정립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시사해 준다. 이런 논의를 밑바탕으로 2005년에 들어 한국여가문화학회는 2차 콜로퀴움으로서 한국적 여가학 정립을 위한 체계적 틀짜기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오늘 그 첫발을 내딛게 된다. 7개의 대영역으로 구분하여 모두 14명의 발제자가 콜로퀴움에 초대된다.

 

첫 번째 영역은 여가-사회-문화라는 주제로 여가학 총론에 해당하는 발제가 될 것이다. 여가학의 범주와 여가학의 접근방법론이 논의된다. 두 번째 영역에서 여섯 번째 영역은 여가학의 하위 해당분야를 열거한 것으로서 가족과 여가, 여가와 교육, 여가와 문화콘텐츠, 여가와 젠더, 여가와 대중문화를 주제로 다루게 된다. 일곱 번째 영역은 한국여가학이 어떤 방향으로 정립되어야 할지에 대한 야심찬 학제적 밑그림을 제시할 것이다. 콜로퀴움의 발제와 발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

일 시

주  제

발          표

발 표 자

토론

사회자

1

4/26

여가․사회

․문화

여가학인가,여가문화학인가!

김영순(인하대 사회교육과 교수)

주은우(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현대사회와 여가: 어떻게 여가연구를 할 것인가

김성기(한일장신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2

5/31

가족과 

여가

여가와 가족, 수행공동체?

이현지(계명대 교양학부 교수) 

노용구(고려대 체육학과)

가족과 여가 컨설팅

박수정(인하대 예술체육학부 교수)

3

6/28

여가와 

교육

여가, 시간, 체험 그리고 평생학습

이병준(부산대 교육학과 교수)

유태호(고려대 체육교육과 교수)

스포츠 여가의 도사리: 편수와 바치 교육

김진희(경북대 중등교육연구소 연구교수)

4

9/27

여가와 

문화콘텐츠

인터넷 게임을 즐겨라

김양은(사이버문화연구소 소장)

김민규(게임산업개발원 팀장)

문화기호학과 여가문화 콘텐츠

백승국(한국외대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5

10/25

여가와 

젠더

여가, 이제 성인지적 관점에서

말해보자

류정아(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영미어문학부 교수)

에코페미니즘과 여가

박혜영(인하대 서양어문학부)

6

11/29

여가와 

대중문화

프랑스 미디어의 매력

박지선(인하대 교육연구소 전임연구원)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교수)

광고 속에 비쳐진 여가문화의 

텍스트 기호론적 분석

오장근(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7

12/27

한국 여가학의 문화적 맥락

한국적 여가 연구와 글쓰기

이철원(연세대 사회체육학과 교수)

김정운 (명지대 여가정보학과 교수)

여가학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그 수용

최석호(고려대 사회학화)


위에서 제시한 두개의 총론적 범주와 다섯 개의 각론적 범주이외에 좀더 실용적이면서 구체적인 스포츠-레크레이션학, 이벤트학, 관광학 등의 학문적 영역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주제는 이와 같은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범주의 상위에 있는 메타학적 부분영역만을 거론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적 여가학의 정립을 위한 밑그림을 통합적, 학제적 입장으로 몰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가학 혹은 여가문화학 정립을 위해 어떤 전략적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여가학을 문화학의 대등범주로 놓던가, 여가문화학을 문화학의 하위범주에 놓던가 하는 양단적인 결정을 해야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후자의 경우, 즉 여가를 연구하는 학문인 여가학을 ‘여가문화학’으로 놓고 보는 관점에서 출발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여가문화학을 문화학의 하위범주로 놓고 보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가 그 자체가 바로 ‘인간 삶의 총제’ 혹은 ‘인간의 생활 양식’ 내지는 ‘한 사회내에서 의미와 즐거움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여가문화학을 들어밀기 위한 문화학의 둘레를 살펴보고 여가문화학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

 

 

2. 두 번째 이야기: 학제적 학문으로서 문화학


요 즘 세계는 ‘문화’, ‘소통’, ‘미디어’가 화두이다. 이 화두는 우리의 일상은 물론 여가에도 그 폭을 확장한다. 특히 이 세 키워드를 묶는 새로운 학문의 패러다임이 문화학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있다. 문화는 흔히 사용되고 익숙한 용어이지만 문화학이란 어떻게 보면 생소한 학문임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서점에서든,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문화학’이란 용어로 검색되는 책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 렇다면 문화학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문화학은 학문적으로 이미 오래전에 형성되어 왔지만 문화학으로서의 학문적 정체성을 지닌 것은 90년대 후반으로 자리매김된다(이 점은 여가를 학문적으롷 접근했던 시기와 교묘히 일치하고 있다). 이 때부터 독일을 중심으로 정신과학, 문예학, 역사학, 사회학 등을 문화학적으로 개혁, 변화시키려는 혹은 문화학적 시각에 비추어 보려는 노력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기류를 살필 수 있다. 영미권에서는 이미 1960년대 이래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는 새로운 형태들이 생겨나고 제도적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에 독일에서는 약 10년 전부터 특히 정신과학을 문화학적으로 새 단장을 하는데 따른 가능성과 문제점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요즘 독일의 학술적 논의에서 ‘문화’라는 개념이 일단은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그와 아울러 단수개념으로서의 ‘문화학’ 혹은 복수개념으로서의 ‘문화학들’에 대한 인기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학이 독자적 단일 학문체계를 의미할 때 “문화학”이란 단수형이 쓰이며, 다른 모든 학문들과 연계하여 여러 차원의 문화학으로 분화된 것을 총괄하여 나타낼 때에는 “문화학들”이란 복수형을 쓰고 있다.)

 

그 렇지만 이제까지 수많은 저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수많은 저술들 때문에 문화학의 윤곽과 프로필은 더욱 명확하지 않다(이 점은 여가학의 논의들과도 일치한다). 더욱이 문화학의 부상은 결코 만장일치의 박수갈채만 받았던 것이 아니라, 상당 수의 안티 세력과 비판자들로 하여금 학문적 논의를 자극 토록하였다. 물론 신문 잡지의 문화면에서 혹은 학계에서 장기전의 양상을 띠고 벌어지고 있는 ‘문화학(들)’에 대한 열띤 논쟁에서 언제나 분명치 않은 것이 있다.

 

이 런 “비운의 논쟁”에서 실제로 무엇에 대해서 또 어떤 차원에서 논의가 격렬히 진행되고 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특정한 혹은 모든 정신과학 및 사회과학의 분과학문 전반에 걸쳐 과연 문화학적 혁신이 필요한가, 둘째 프랑스와 앵글로 색슨적인 연구방향을 독일식 정신과학적 학문풍토에 수용하거나 가능한 혹은 불가능한 통합과정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셋째 지난 수년간에 걸쳐 ‘문예학과 문화학 또는 문예학이냐 문화학이냐? 혹은 문화학으로서의 문예학’과 같은 식의 이론적, 방법적 또는 개념적 원칙문제들에 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개략적으로 살펴본 문화학 논의의 맥락은 종종 약간은 분명치 않고 초점이 잡히지 않는 본래의 특성 말고도 특히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는 세 가지 포괄적인 경향들로 특징지어진다.


∙ 첫째, 매우 생산적인 일련의 경계-넘어서기

∙ 둘째, 국제적인 성격 및 ―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과 관련하여 ― 앵글로 색슨과 프랑스의 이론 및 연구방향의 절충주의적 수용

∙ 셋째, 토론 맥락의 다성적(polyphon)이고 다원적인 관점.


세 번째 관점은 특히 여러 가지 목소리와 관점의 다양성은 제반 문화개념과 문화이론, 출발점, 노선과 방법 및 문화학적 고찰방법과 연구대상 등의 다원화로 이어졌고, 그럼으로써 “문화학 연구작업의 방법적 및 개념적 패러다임”을 지금까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문화학 관련 논쟁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문화학에 입각한 여러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그 논쟁에 참여할 (그리고 그 논쟁에 얽혀 들어갈) 뿐만 아니라 문화학(들)의 '프로그램' 까지도 경계확장과 경계-넘어서기로 각인되어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분과 학문들의 제도적 분류에 대한 비판과 분과 학문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 이 논쟁들의 출발점에 포함된다. 비판과 노력, 이 두 가지는 다시금 한편으로는 문화현상을 조사 연구하는 데에는 학제적 협동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적 문제로 말미암아 문화학적 연구작업이 방해받는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미텔슈트라스는 일찍이 이 제도적 문제를 “문제 발전과 분과학문 발전의 불균형”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문화가 각각의 경우 어떤 식으로 이해되던 간에 ‘문화’라는 것은 특정한 학문의 전문화와는 반대 입장에 서 있으며 그리고 “각 분과학문의 전문가들을 위한 문제점으로 규정되는” 그런 호의를 누구에게도 베푸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연구되어야 할 문화적 문제점들의 발전과정과 분과학문들의 전통적 이해 및 차별성 사이에는 괴리가 생겨나게 된다.

 

문화학에 입각하여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을 다방면에 걸쳐 쇄신하려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로 문화학들이 무엇보다도 “학문적 인지능력을 되찾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특히 문예학, 역사학, 사회학의 인식 및 관심대상 사이의 빈틈에 놓여있어 분과학문의 검색체계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 까닭에 거의 관심대상이 되어오지 못했던 문화적 문제영역들이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을 문화학적 방향으로 학제적 발전을 꾀하는 일은 그저 현존하는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 “‘분과학문 가로지르기 식’(transdisziplinär)의 협동연구” 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물 론, 각 분과학문들은 그들 나름의 전문적인 역량 -문예학자들의 경우 허구의 텍스트를 그리고 역사학자들의 경우 사료를 다룰 때 갖고 있는- 에 의거할 때에만 비로소 문화학들의 학제적 기획에 실질적으로 공헌할 수 있다고 강조된다. 왜냐하면 “학제적 역량이란 각 분과학문들의 역량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쉐르페 역시 이와 유사하게 논지를 펼친다. “문예학이 새로 획득한 연구영역을 자신 고유의 역량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인류학, 인종학(Ethnologie), 지리학, 신화연구 혹은 매체학에 근간을 둔 문예학은 자신의 정통성을 찾을 수 없으며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없다. 즉 문예학은 ‘테마’, 방식 그리고 인식목적에 관련하여 자신의 몫을 규정해야 만 한다.” 학제적 혹은 분과학문 가로지르기식의 협동연구에서 내포하고 있는 분과학문들 사이의 경계 넘어서기는 전공을 특성화한 표준, 방법, 그리고 역량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문화학은 분과학문들의 경계를 허무는 일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분과학문들은 자신의 기능상의 전제조건, 방법, 이론적인 기본가정들을 기반으로 연구해야만 한다) 쌍방간에 명확히 자신의 위치를 밝히기 위한 자신의 경계 넘어서기를 지향한다”.

 

한걸음 나아가 문화학에 대한 논쟁은 단순히 학제적 뿐 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도 경계를 넘어선다. 이른바 영미에서의 문화연구적 논의와 독일에서의 정신과학을 문화학적으로 새 단장하려는 논의를 비교해보면 국가별로 특성화된 학문전통 사이에는 단순히 공통점이나 혹은 적어도 유사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간과할 수 없는 일련의 차이점이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런 차이점은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적절한 연구방향이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내용적으로나 방법적으로 몇 가지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문화학’과 ‘문화학들’ 개념은 영미에서 발전된 문화연구 형태와는 구분해야 한다. 문화연구의 특성으로는 마르크스적 사회이론과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목표설정과 연구대상을 현대 대중문화(popular culture)로 확장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문화학적인 이론에 대한 논의들의 학제적 경계-넘어서기국제적 차원은 또한 ‘문화학(들)’ 이라는 개념을 내건 열띤 논의 맥락의 특징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다성적이고 다양한 관점에 대한 주요인들 중의 두 가지다. 분과학문들과 연구방향 및 출발점들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다성적이고 복합적으로 전망한다는 것은 “행위세계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Bachmann-Medick 1996b, 26쪽) 것과 같다. 따라서 문화학적인 성찰방식과 테마와 연구대상 및 문화개념, 문화이론, 출발점과 방법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연구대상 범위와 연구정책을 문화학적으로 확장할 것을 강조하여, 그간 수많은 경쟁적인 이론과 출발점과 연구방향이 전개되어 왔다. 그것들의 최소 공통분모는 ‘문화학적 경향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문화학에 주로 근간을 둔 개념들의 스펙트럼은, 문예학을 예를 들어 특히 영향력 있는 연구방향 만을 언급한다면, 수용사적, 영향사적 그리고 기능사적(funktionsgeschichtlich) 출발점에서부터 신역사주의 문화유물론과 담론분석을 거쳐 문화사회학, 문화인류학, 문화기호학적인 출발점까지 이른다.

 

다른 분과학문에서는 ― 무엇보다도 문화사에서 (Daniel 2002 참조) ― 이른바 ‘해석학적 전환’(interpretive turn, Hiley 외 1991 참조)과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 Hartmann/Janich 1998 참조)을 맞이하여, 이와 유사하게 새로운 출발점과 연구방향이 ― 예를 들면 사회사, 일상사, 심성사, 문화사적으로 ― 다양하게 펼쳐졌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동향은 문화학적인 문제를 설정하는데 내용상의 주안점과 관심에서 몇 가지 일치점을 보여주지만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Daniel 2002 참조).

 

마찬가지로 지난 수십 년 간 발전되고 논의되었던 문화학(들)의 개념들 역시 다양하다. 문화학에 대한 입장이 다양하고 기초적인 문제가 미해결 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문화학들에 관한 논의에서 문화학(들) 개념이 설명되지 않은 채 단․복수로 공존”(Böhme/Matussek/Müller 2000, 33쪽)하고 있는 점이다. 단수로 사용할 때는 대개 그 개념이 새로운 분과학문의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이 새로운 분과학문은 전공 포괄적 경향을 띄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제도화 문제 하나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분과학문 형태를 필요로 하며, 여러 측면에서 분과학문 형태를 갖춘다. 혹은 “조절 형식”(Böhme/Scherpe 1996b, 12쪽)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이 조절형식은 서로 이질적이고, 고도로 전문화된 학문들의 서로간의 폐쇄적인 성과물을 ‘소통시키’고, 구조적인 공통점을 토대로 투명하게 하며, 장기적인 추세를 바탕으로 질문을 던지고, 분과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상호관계, 대조, 차이, 교환과정 및 문맥들의 연관성을 엮어내기 위한 이해수단 즉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일종의 기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책)

 

문화학 관련 논쟁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문화학에 입각한 여러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그 논쟁에 참여할 (그리고 그 논쟁에 얽혀 들어갈) 뿐만 아니라 문화학(들)의 '프로그램' 까지도 경계확장과 경계-넘어서기로 각인되어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분과 학문들의 제도적 분류에 대한 비판과 분과 학문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 이 논쟁들의 출발점에 포함된다. 비판과 노력, 이 두 가지는 다시금 한편으로는 문화현상을 조사 연구하는 데에는 학제적 협동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적 문제로 말미암아 문화학적 연구작업이 방해받는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미텔슈트라스(Mittelstraß 1987, 156쪽)는 일찍이 이 제도적 문제를 “문제 발전과 분과학문 발전의 불균형”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문화가 각각의 경우 어떤 식으로 이해되던 간에 ‘문화’라는 것은 특정한 학문의 전문화와는 반대 입장에 서 있으며 그리고 “각 분과학문의 전문가들을 위한 문제점으로 규정되는”(앞의 책, 154쪽 이하) 그런 호의를 누구에게도 베푸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연구되어야 할 문화적 문제점들의 발전과정과 분과학문들의 전통적 이해 및 차별성 사이에는 괴리가 생겨나게 된다.

 

문화학에 입각하여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을 다방면에 걸쳐 쇄신하려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로 문화학들이 무엇보다도 “학문적 인지능력을 되찾는 데에도” (앞의 책, 155쪽)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특히 문예학, 역사학, 사회학의 인식 및 관심대상 사이의 빈틈에 놓여있어 분과학문의 검색체계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 까닭에 거의 관심대상이 되어오지 못했던 문화적 문제영역들이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을 문화학적 방향으로 학제적 발전을 꾀하는 일은 그저 현존하는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 “‘분과학문 가로지르기 식’(transdisziplinär)의 협동연구”(Müller 1999, 576쪽) 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물 론, 각 분과학문들은 그들 나름의 전문적인 역량 -문예학자들의 경우 허구의 텍스트를 그리고 역사학자들의 경우 사료를 다룰 때 갖고 있는- 에 의거할 때에만 비로소 문화학들의 학제적 기획에 실질적으로 공헌할 수 있다고 강조된다. 왜냐하면 “학제적 역량이란 각 분과학문들의 역량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쉐르페(Scherpe 1999, 22쪽) 역시 이와 유사하게 논지를 펼친다. “문예학이 새로 획득한 연구영역을 자신 고유의 역량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인류학, 인종학(Ethnologie), 지리학, 신화연구 혹은 매체학에 근간을 둔 문예학은 자신의 정통성을 찾을 수 없으며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없다. 즉 문예학은 ‘테마’, 방식 그리고 인식목적에 관련하여 자신의 몫을 규정해야 만 한다.” 학제적 혹은 분과학문 가로지르기식의 협동연구에서 내포하고있는 분과학문들 사이의 경계 넘어서기는 전공을 특성화한 표준, 방법, 그리고 역량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문화학은 그렇지만 분과학문들의 경계를 허무는 일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분과학문들은 자신의 기능상의 전제조건, 방법, 이론적인 기본가정들을 기반으로 연구해야만 한다) 쌍방간에 명확히 자신의 위치를 밝히기 위한 자신의 경계 넘어서기를 지향한다”(Müller 1999, 576쪽 이하).

 

한걸음 나아가 문화학에 대한 논쟁은 단순히 학제적 뿐 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도 경계를 넘어선다. 이른바 영미에서의 문화연구적 논의와 독일에서의 정신과학을 문화학적으로 새 단장하려는 논의를 비교해보면 국가별로 특성화된 학문전통 사이에는 단순히 공통점이나 혹은 적어도 유사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간과할 수 없는 일련의 차이점이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런 차이점은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적절한 연구방향이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내용적으로나 방법적으로 몇 가지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문화학’과 ‘문화학들’ 개념은 영미에서 발전된 문화연구 형태와는 구분해야 한다. 문화연구의 특성으로는 마르크스적 사회이론과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목표설정과 연구대상을 현대 대중문화(popular culture)로 확장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문화학적인 이론에 대한 논의들의 학제적 경계-넘어서기국제적 차원은 또한 ‘문화학(들)’ 이라는 개념을 내건 열띤 논의 맥락의 특징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다성적이고 다양한 관점에 대한 주요인들 중의 두 가지다. 분과학문들과 연구방향 및 출발점들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다성적이고 복합적으로 전망한다는 것은 “행위세계(Handlungswelt)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Bachmann-Medick 1996b, 26쪽) 것과 같다. 따라서 문화학적인 성찰방식과 테마와 연구대상 및 문화개념, 문화이론, 출발점과 방법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연구대상 범위와 연구정책을 문화학적으로 확장할 것을 강조하여, 그간 수많은 경쟁적인 이론과 출발점과 연구방향이 전개되어 왔다. 그것들의 최소 공통분모는 ‘문화학적 경향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문화학에 주로 근간을 둔 개념들의 스펙트럼은, 문예학을 예를 들어 특히 영향력 있는 연구방향 만을 언급한다면, 수용사적, 영향사적 그리고 기능사적(funktionsgeschichtlich) 출발점에서부터 신역사주의(Glauser/Heitmann 1999 참조) 및 문화유물론과 담론분석을 거쳐 문화사회학, 문화인류학, 문화기호학적인 출발점까지 이른다.

 

다른 분과학문에서는 ― 무엇보다도 문화사에서 (Daniel 2002 참조) ― 이른바 ‘해석학적 전환’(interpretive turn, Hiley 외 1991 참조)과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 Hartmann/Janich 1998 참조)을 맞이하여, 이와 유사하게 새로운 출발점과 연구방향이 ― 예를 들면 사회사, 일상사, 심성사, 문화사적으로 ― 다양하게 펼쳐졌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동향은 문화학적인 문제를 설정하는데 내용상의 주안점과 관심에서 몇 가지 일치점을 보여주지만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Daniel 2002 참조).

 

마찬가지로 지난 수십 년 간 발전되고 논의되었던 문화학(들)의 개념들 역시 다양하다. 문화학에 대한 입장이 다양하고 기초적인 문제가 미해결 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문화학들에 관한 논의에서 문화학(들) 개념이 설명되지 않은 채 단․복수로 공존”(Böhme/Matussek/Müller 2000, 33쪽)하고 있는 점이다. 단수로 사용할 때는 대개 그 개념이 새로운 분과학문의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이 새로운 분과학문은 전공 포괄적 경향을 띄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제도화 문제 하나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분과학문 형태를 필요로 하며, 여러 측면에서 분과학문 형태를 갖춘다. 혹은 “조절 형식(Form der Moderation)”(Böhme/Scherpe 1996b, 12쪽)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이 조절형식은 서로 이질적이고, 고도로 전문화된 학문들의 서로간의 폐쇄적인 성과물을 ‘소통시키’고, 구조적인 공통점을 토대로 투명하게 하며, 장기적인 추세를 바탕으로 질문을 던지고, 분과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상호관계, 대조, 차이, 교환과정 및 문맥들의 연관성을 엮어내기 위한 이해수단 즉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일종의 기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책)

 

 

3. 세 번째 이야기: 문화학의 개념


이 렇게 이해하면 ‘문화학’은 개별 학문이 아니라 “보다 높은 성찰의 단계이자 일종의 움직이는 연결장치(bewegliche Verschaltung) 형태이며 어쩌면 정신과학의 현대화를 위한 조절단계(Steuerungsebene)일수도 있다”(앞의 책). 그와 반대로 복수형태인 ‘문화학들’이라는 개념은 우선은 이전의 철학부 학과들의 전공분야들을 일컫는데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용어는 “정신과학들과 거의 동일하게 사용되지만, 문화학들에 속하는 분과학문들과 독일식 정신사적 전통과는 구분하여야 한다”(Böhme 2000, 356쪽).

 

그 외에도 최근 유행하는 논쟁에서 실제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 그 용어가 단수로 쓰이던 복수로 쓰이던 간에 ― 각양 각색이다. 이 ‘문화학(들)’ 학술용어는 지금까지 수많은 노력이 이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용어에는 수많은 상이한 연구방향 및 경향이 특히 정신 사회과학에 포괄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용어는 개방적이고 활발하고 학제적인 논의맥락을 대신하는 집합개념 역할을 하기 때문이며, 그 용어의 확장범위에도 이의의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급팽창되어 이용되고 있는 ‘문화학(들)’의 개념은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상이한 의미로 사용된다.


매우 넓은 의미에서 ‘문화학(들)’은 전통적인 정신과학의 다양한 분과학문들을 통합해야 할 전공 포괄적 관련영역을 뜻한다.

두 번째로 ‘문화학(들)’이란 개념은 여러 측면에서 제기된 문예학, 역사학, 사회학들의 변혁과 확장을 요구하는데 있어 강령적인 구호로 사용된다.

좀 더 좁고 특수한 의미에서 ‘문화학’은 개별적인 어문학 중에서 어느 한 부분영역 내지는 어느 특정한 방향을 뜻한다. 그것은 세밀히 관찰해보면 때때로 전통적 지역학을 의미한다.

개념적 명확성이 별로 필요치 않은 것은 민속학이나 유럽 인종학(Europäische Ethnologie)을 문화학 이라고 표시할 때이다(Glaser/Luserke 1996 참조).


문화학 논의에 관련된 분과학문 및 출발점과 더불어 문화학(들)의 콘셉이 다양하듯이 그것들에 의해 각인된 문화개념들과 문화이론들 역시 각양각색이다. 따라서 문화학 혹은 문화학들의 연구대상영역과 방법들을 규정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은 한편으로는 적용된 문화개념과 문화이론에 의해 구별되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도들은 각각의 제안된 이론적 핵심 개념과 방식에 따라 변형된다. 그것에 상응하여 중심개념인 ‘문화’의 상이한 규정들은 다양하며 모호하다.

 

문 화에 대한 이해는 지난 십 여 년 동안 상이한 학문들의 개념정의를 통해서 완전히 변하였다. 문화개념의 좀 더 명확한 규정을 고무한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학적, 인류학적, 사회학적, 기호학적인 연구들이며, 그것들을 통해 몇몇의 어느 지점에서 일치하는 소실점(Fluchtpunkte)이 드러난다. 문화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조성된다는 확신과 문화는 ‘고급’문화만을 제한해서도 안되며 어느 하나의 공동체의 예술적인 삶의 표현과 같다고 여겨서도 안 된다는 테제도 그 소실점에 속한다.

 

문 화학적 연구대상 영역을 확장하려는 요구는 전승되어 온 텍스트 개념과 문학개념에 대한 회의(懷疑)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정형화된 반대개념을 거부하고 금세기 매체문화를 꼭 포괄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Schönert 1996 참조). 다시 말하자면 “문화학적인 ‘경계확장’은 이른바 고급문화의 특권을 박탈하게 된다”(Böhme/Matussek/Müller 2000, 108쪽).

 

문 화개념의 역사적 의미(Böhme 1996 참조)를 재구성하거나 현재의 다양한 문화 개념이나 문화이론(Fleischer 2001; Reckwitz 2000 참조)을 소개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별반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단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지난 수 십 년 간의 상이한 구상들의 다양함 속에서도 기호학적, 의미 중심적, 구조주의적 특징을 띈 문화개념에 대한 전공 포괄적인 선호도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는 인간에 의해 생산된 상상과 사고형식과 감각방식과 가치와 의미의 총체적인 복합물로서 정의되어지며, 이 복합물은 상징체계 속에서 유형화된다.

 

이 런 의미에 중점을 둔 개념정의에 따르면, 단지 물질적 (예를 들면 예술적) 표현형식만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와 예술품 탄생을 가능케 하는데 필수적인 정서적 성향도 문화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그런 기호학적인 문화개념은 문화란 물질적 측면 ― 한 국가의 ‘문화재’ ― 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서적 측면(Posner 1991)도 갖고 있다는 인식을 고려한다. 그것에 상응해서 최근 다음과 같은 문화이해가 선호된다. 문화인류학과 문화기호학에 뿌리를 둔 ‘문화는 텍스트다’(Bachmann-Medick 1996a 참조) 내지는 ‘문화는 기호체계다’(Posner 1991 참조) 그리고 문화학을 “일상 삶 속에서 사회적 기표의 인지양식(Wahrnehmungsstile)과 상징화양식과 인식양식(Kognitionsstile)을 분석하는, 하나의 해석학적이자 의미를 보편화하는 방식”(Böhme/Scherpe 1996b, 16쪽)으로 이해하는 것이 선호된다.

 

그 외에도 기호학적 문화개념의 세 가지 차원 ― 즉 물질적, 사회적, 정신적 차원 ― 뿐만 아니라 문화를 사회의 현실모델을 테마화한 일종의 소프트웨어와 비슷한 ‘통합프로그램’이라고 은유적으로 특징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를테면 “문화는 텍스트다”(Bachmann-Medick 1996a)라는 메타포 ― 문예학에서 인류학적 전환이 진행되는 동안 보편화된 ― 와 더불어 유행어처럼 표현되는 “문화의 사회적 차원을 기호학적으로 은유하기”나 “사회학적 비환원주의(inverser soziologischer Reduktionismus)”(Ort 1999, 542쪽)도 서로 결코 환원시킬 수 없는 문화의 다양한 범주들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따라서 ‘문화는 텍스트다’ 라는 보편화된 상투어와는 반대로, 텍스트 사용자 ― 문화의 정서적 사회적 측면을 포함해서 ―에게 적절하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이 메타포는 잘못된 길을 인도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 상투어가 문화학의 강력적 구호로서 폭발적인 인기”(Böhme/Matussek/Müller 2000, 136쪽)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텍스트다’라는 메타포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 째, 은유적이고 보편화된 텍스트 개념과 좁은 의미의 문헌에 제한된 텍스트 개념 사이의 차이를 없애면 방법론상 아포리아(Aporie)에 쉽게 빠지고 만다. 문자로 된 텍스트 안에서만 전승된 문화적 행위를 직접적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독서법에 얽매 이게 하는 시도는 문화적 행위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텍스트의 고유 논리를 간과할 수가 있다. (중 략) 둘째, 텍스트 개념의 확장과 보편화와 더불어 문화적 행위의 다른 모든 결정화 형식을 해독하는데 왕도(王道)처럼 보이는 언어적 접근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 드물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영화, 무용, 연극, 관습, 퍼포먼스, 음악, 회화를 말하자면 모든 문화행위의 형태들을 이 독서법 모델에 포함시킨다면 그는 그 차이에 따른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개개의 예술이나 문화적 행위들의 각각의 특유의 잠재적 의미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앞의 책. 136쪽 이하)


이 상에서 설명했듯이 기호학적 문화개념이 선호되고 있지만, 위의 몇 가지 지적으로 현재 논의되고 있는 문화개념들과 문화이론들(Fleischer 2001; Reckwitz 2000 참조)의 분파가 충분히 논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대상을 중심으로 한 이론적(gegenstandstheoretisch) 문화개념 정의는 필연적으로 축소화를 야기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Jaeger 2001b, 17쪽 이하 참조) 따라서 ‘문화학’을 “하나의 진행과정 즉 ‘연구대상물’이 아닌 문제제기를 통해서 기호학적인 의미에서 실용학문적으로 증명하고 규정하는 실행학문”(Henningsen/Schröder 1997, 7쪽; Appelsmeyer/Billmann-Mahecha 2001 참조)이라고 일컫는 것은 덧없는 일만은 아니다. 또 다른 편으로는 특별히 문화개념들의 다양함은 ‘문화’를 ― 마치 ‘기억덩어리’처럼 ―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문제화‧연구‧묘사해왔고, 지금도 그러한 추론적 가설로 파악해야 한다”(Pethes/Ruchatz 2001, 13쪽)는 인식을 강조한다. 경쟁적인 문화개념들의 다양함은 특히 관찰자들이 설정한 이론 종속적이고 분과학문에 종속적인 가설들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설명된다. 이런 사실은 ‘문화는 텍스트다’라는 문화인류학적인 메타포 뿐 만 아니라 모든 다른 개념정의나 문화 메타포에도 해당된다(Konersmann 1998, 327-354쪽 참조).

 

모든 문화개념과 문화이론을 가설적인 것으 로 바라보는 입장은 결국 문화학적인 대상들과 문제제기 영역에도 해당되며 동시에 또한 그것들의 주목할 만한 다원성과 이질성을 설명해 준다. 더 나아가서, 학문적 대상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미리 고안해’ 낼 수 도 없다는 입장이 그사이에 통용된 듯 하다.

 

명 확성과 함축성을 기대하면서 슈미트(2000, 332쪽)는 체계이론적이며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논지를 편다. 그는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한다. 모든 대상의 구조는 “구분과 명칭에 의해서 즉 차별성관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한 연구분야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대한 논의는 관찰자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학문은 그 대상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과 문제점에 관해 이야기한다. 학문은 그 ‘자체’로는 존재치 않으며 단지 학자들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앞의 책).

 

문화학 내지는 문화학들의 끊임없는으로 인해 이런 개념들이 ― 문화연구라 는 상표하에서 그러하듯이 ― 상이하고 다양한 경향, 분과학문, 출발점 및 이질적 연구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속여서는 안 된다. 그 개념들에는 흔히 공통적인 이론적 방법론적 전공적 토양이 부족하다. 따라서 문화학은 오히려 집합개념 내지는 학문정치상의 유행어적 성격을 띠며, 그 유행어는 학문적으로 분명히 규정된 분과학문도 특정한 연구방향도 나타내지 못하며 미해결의, 학제적이며,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국제적 논의맥락을 지시한다. 이런 문화학의 팽창은 이제까지 적어도 대서양 양편에서는 본질적이라기 보다는 강령적으로, 체계적이라기 보다는 통일성없이, 때로는 방법론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논쟁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 와 상응해서 이론적-방법론적 토대, 연구대상영역, 주도개념 혹은 문화학 내지는 문화학들의 특성을 규정하는 것은 이제까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문화학적인 이론논의가 학제적이고 국제적으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서로 다른 국가들과 국가적 ‘연합공동체’속에서 아주 상이한 형식들을 받아들이는 정황으로 인해 문화학을 규정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게 되었다.

 

최근의 문화학들 특성을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특히 증가되는 국제성과 학제성에 관련이 있다. 이것은 각 국가별 특유의 전통에 젖은 지적 환경 사이에서, 문화학적인 분과학문의 공통점과 상이점에 대한 이해, 상반되는 입장과 의미에 대한 이해, 연구전략과 방법론적 구상에 대한 이해 및 결국에는 문화학의 실질적인 과제분야와 기능규정에 대한 이해를 훨씬 더 복합적으로 만들었다(Jaeger 2001b, 9쪽 이하 참조).

 

더 복합적인 것이 있다. 독일식 문화학 논의 과정에서 앵글로 색슨과 프랑스의 이론과 연구콘셉을 모방적으로 수용할 때 주로 간과하게 되는 두 가지다. 하나는 논의가 각각의 상이한 국가적, 학문정책상의 콘텍스트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콘텍스트를 도외시하고 문화간 이론을 수용할 때 너무나 쉽게 나타나는 본성적인 관점상의 변용(Verzerrungen)과 동질화다. 이런 이유로 해서 클레멘스 포른슐레겔(Clemens Pornschlegel)은 당연히 의미있는 제안을 했다.


‘문 화학들’을 연구방법별로 그리고 주제별로 통일하는 것이 (불)가능한지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이제까지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런 ‘패러다임적’ 메타 단계를 벗어나 작금의 논단을 각기 분리된 두 가지 복합적 문제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최근 유행하고 있는 논쟁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체 ‘정신과학의 정통성 위기’ ― 아주 올바른 지적이다. ― 란 무엇인가라는 문맥 속에서 ‘문화학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고 독일 특유의 ‘정신과학’의 위기문제에는 전혀 얽매이지 않고 저자 개개인의 제안과 출발점을 (중략) 논의하는 것이다. ― 위기의식은 미국이나 영국 혹은 프랑스에서는 쟁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유령(ghost)’이나 ‘정신(esprit)’에 대한 학문이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 그렇게 되면 제안과 출발점이 만들어내지도 않았고 형성하려고 꾀하지도 않았던 ‘방법적 패러다임’을 고려할 필요없이 제안과 출발점이 자기 나름의 상이한 방식으로 설정하고 대답하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연구대상 중심의 방법상의 문제에 관련된 것만 논의하면 된다. (Pornschlegel 1999, 524쪽 이하)


 

4. 네 번째 이야기: 문화학 세우기


문 화학 세우기는 ‘정신과학’의 정통성에 대한 장기적인 위기와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독일 특유의 보다 높은 차원의 논의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정신 및 사회 분과학문들을 문화학적으로 쇄신하는 것에 대한 효용과 단점, 의미와 무의미, 필연성 혹은 불필요성에 관한 논쟁을 가속화시켜 궁극적으로 학문의 지도를 바꾸고 있다. 따라서 문화학들이 이제 “최근 유행하는 상표 그 이상의 것”(Bollenbeck 1997) 혹은 “페티쉬(Fetisch)”(Harth 1996) 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명하는 것도, 문화와 문화학(들)의 특정 개념을 규정하거나 새로운 문화학적인 해석방식을 권하려는 수준을 넘어선다.

 

문 화학 세우기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문화학에 관한 국제적이고 학제적인 복합적 논의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다양한 분과학문들 편에서 혹은 반대편에서 ‘문화학들’을 방법․주제별로 통합하는 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나 새로운 분과학문의 창설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콘셉들과 출발점들과 이론적 단초들을 가능한 한 체계적으로 검토하 려는 노력이다. 정신과학을 문화학적으로 혁신 할 때 벌어지는 가능성과 문제점에 대해 논쟁할 경우, 중요 콘셉과 출발점과 이론적 단초들이 그 논쟁의 논거로 제시되거나 그 배후에 있다. 문화학 세우기 프로젝트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목적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출발한다.


지 난 수 십 년 동안 앵글로 색슨과 프랑스의 학풍은 구체적이고 분석적인 문제설정과 주제적인 혁신을 침착하게 인지하고 생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를 모범으로 독일 정신과학의 문화학적인 방향설정에 대한 논의가 (중략) 하나의 방법적 패러다임에 역설적으로 고착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Pornschlegel 1999, 531쪽)

 

따라서 ‘문화학들’이란 복수를 여러 번 사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문화학 세우기 프로젝트 몇 가지 전제조건과 목표를 알리려는 계획된 의도였다.


∙ 첫째, 문화학 세우기 프로젝트는 ‘문화학’이라는 명칭의 (새로운)분과학문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주요목표는 오히려 이론적 전제들과 방법들과 그러한 출발점 및 분과학문의 연구콘셉들에 대해 의식적으로 다양한 관점으로 문화학 입문적 개괄을 하는데 있다. 그 출발점들과 분과학문들은 최근의 문화학적 이론논의에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복수로 된) 문화학들의 학제적 개선에 특히 중요한 동인이 된다.

 

∙ 둘째,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복수로 사용된) ‘콘셉들’과 ‘이론적 단초들’ 이라는 개념들은 문화분석을 위한 프로그램, 모델 그리고 개념들을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음을 암시해야만 한다.

 

∙ 셋째, ‘출발점들’은 이미 언급했듯이 연구방향들과 이론제안들과 방법들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확장 가능성의 범위는 작금의 문화학들 안에서 드러나며, 공시적인 단면으로 이 확장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전망들’ 은 단지 이론논의들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학적인 관찰방식에 의해서 어떤 문제설정과 연구영역들을 각각 해명하는지 내지는 특정한 콘셉들과 출발점들이 앞으로의 연구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희망과 어떤 식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가를 암시해야만 한다.


적 어도 분과학문들의 문화학적 확장이나 쇄신이 미래를 위한 새로운 관찰 방식과 희망을 열어주고 있다는 사실에는 어느 정도 일치를 보이고 있는 듯 하다. 이상에서 설명한 다양한 이론적 콘셉들과 출발점들과 연구방향들 및 최근의 문화학적 이론논쟁의 다양한 목소리를 참작하면, 문화학 세우기 프로젝트의 다중적 관점의 성향이 드러난다. 문화학 세우기 프로젝트는 입장과 연구경향의 다원성과 이질성을 인위적으로 묶고, 동질화하는 대신에, ‘문화’와 문화학적인 문제제기를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바라보며, 착안하며, 연구하는 여러 상이한 구상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어 보인다. 상대적으로 특정한 분과학문이나 이론적 입장에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에 다중적 관점의 서술방식은 문화학적 담론의 다성적 성격을 담을 수 있게 한다.

 

문 화학 세우기 프로젝트는 상이한 출발점과 접근방식을 동등하게 나란히 전시하며 동시에 이런 개관을 통해 상호 관련 지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한편으로는 각각의 생성관계, 이론적 토대와 각각의 출발점과 연구방향의 특수성을 분리하여 묘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이 성향은 동질화라는 용납할 수 없으며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을 감소시킨다. 이 동질화 문제는 문화연구 내지는 후기구조주의 및 신구조주의를 수용 (혹은 재구성)할 때 여러모로 지적되었던 바 있다(부분적으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적되고 있다).

 

독일에서의 문화학은 ‘문예학을 문화학적으로 쇄신’한는 특징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그 학문적 범위에 있어서도 정신․사회과학 인접학문들의 광범위한 문화학적인 연구방향을 ― 문화사, 문화사회학, 문화심리학, 문화생태학 에서부터 학제적 이방문화학(Fremdkulturwissenschaft), 문화공간연구, 젠더연구, 매체문화학에 이르기까지 ― 고려하였다. 이런 점은 여가 연구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뿐 만 아니라 “상이한 문화적 현상과 분야를 ― 예술과 문학, 정치와 사회, 종교와 법 ― 새로운 상호관계 속에서 고찰할 수 있게 하는 문화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회상의 개념을 둘러싸고 형성되었다. 이는 곧 문화학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물 론 (모든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출발점과 분과학문의 선택에 이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선택은 우선적으로 정신과학의 문화학적인 쇄신에 대한 논의와 문화학 연구의 혁신적 콘셉의 발전을 위한 연구방향들이 갖고 있는 의의를 기준으로 삼았다.

 

 문화학에 있어서 최근 발전경향과 연구방향을 고려해 볼 때, ‘문화’ 현상의 여러 다른 차원을 연구하는 분과학문의 다양성이 문화철학, 예술사, 종교학과 문화지리학(Kulturgeographie)등으로의 확장도 생각할 수 있겠다. ‘문화적 전환’이 뒤늦게 주목받은 몇몇 분과학문들(예를 들면 언어학, 법학, 경제학)의 대상과 문제제기들도 대단히 유용하게 문화학적으로 조망되었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그래서 언어와 문화, 법과 문화, 문화경제학 등의 연구를 고무시켰다.

 

 

5. 다섯 번째 이야기: 여가문화학으로


위 에서 제기된 이야기들은 문화학을 정립하기 위한 전망들과 그 대상 분야들을 위한 논의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학과 여가학(적어도 ‘여가문화학’의 의미)은 어느 정도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문화학의 연구범주들이 통합적 경향을 띄면서 다학제적 접근을 가능케하는 점을 여가학을 위해서도 상정해 볼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아래 표에서는 각 독립분과학문과 문화 및 여가의 연구가 결합한 것을 보여준다.


분과학문

문화학

여가학

철학

문화철학

여가철학

역사

문화사

여가사

인류학

문화인류학

-

사회학

문화사회학

여가사회학

기호학

문화기호학

여가기호학

심리학

문화심리학

여가심리학

교육학

문화교육학

여가교육학

행정학

문화행정학

여가행정학

경제학

문화경제학

여가경제학

경영학

문화경영학

여가경영학

생태학

문화생태학

여가생태학

정보학

문화정보학

여가정보학

 

문화연구

여가연구


어 떤 학문이 정립되려면 위에서 이야기한 바처럼 연구 대상과 연구방법론이 예를 들어 문화에 대한 경제학적 접근은 ‘문화경제학’이다. 즉 연구 대상은 문화이고 연구 방법론은 경제학인 경우이다. 이렇게 문화학은 여러 학문적 방법론에 힘을 입고 있다. 이렇게 통합적 학제적 학문으로서 그 위상을 발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화학은 그 연구 대상으로 볼 때 메타학문으로 볼 수 있다. 학제적 학문으로서 정립되어 어떤 특정 이론이나 방법론에 의해 문화학이 결정되었다면 분명히 그것은 메타학문적 성향을 지닐 것이다.

 

여 가학은 이렇게 메타학문적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는 문화학의 방법론을 차용하여 여가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가문화학은 곧 여가학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기호학은 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을, 문화경제학은 문화에 대한 경제학적 접근이라면, 여가문화학은 여가학에 대한 메타 이론으로서의 문화학적 접근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가사회학을 우리는 여가에 대한 문화학적 접근 중에서 문화사회학적 접근을 의미하는 것이다. 

 

 

6. 여섯 번째 이야기: 포름과 프로젝트의 여가문화학회


어 떤 학회이든 그 학회가 지향하고 있는 학문 즉 연구대상, 연구방법론이 있어야 하며 포름으로서의 워크숍, 학술대회, 콜로퀴움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포름을 진행하기 위한 그 이상과 취지가 있어야 하는데 본 여가문화학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텍스트들을 통해 학회의 지향점을 살펴 볼 수 있다.


1) 여가와 문화학회 발기 취지문


한국사회의 미래는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질곡의 역사적 상황에 떠 밀려오면서 우리의 참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설계해야 할 때입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은 미래사회 설계를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21세기는 여가와 문화를 통해 형성됩니다.

새 로 시작된 21세기에는 문화적 정체성, 역동성, 그리고 다양성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아울러 여가를 통한 문화적 창의성 개발이 더욱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주5일 근무제로 야기될 여가의 양적, 질적 변화와 삶의 패러다임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문화와 여가의 올바른 접목이 21세기 사회번영의 핵심입니다.

여가의 내용은 한국문화의 발전방향을 결정합니다.

산 업사회에서는 노동하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인간의 전부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놀이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시대입니다. 21세기 정보화사회, 지식기반사회는 인간의 창의력에 기초한 ‘일하듯이 놀고, 놀듯이 일하는 사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가의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21세기 한국문화의 발전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 가와 문화학회는 여가를 화두로 21세기 한국 문화의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여가와 문화의 관계에 관한 ‘학문교차적(cross-disciplinary)’접근을 통해 여가학을 새로운 학문분과로 체계화, 과학화할 것입니다. 또한 여가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학자, 문화예술인을 포함한 전문가들 사이의 활발한 토론과 산학협동이 가능하도록 문화생산의 네트워크를 마련할 것입니다.

여가와 문화학회가 황폐해진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치유하고 건강한 여가와 문화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커뮤니티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미 학회의 취지문에서는 “여가의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21세기 한국문화의 발전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학회의 방향이 여가에 대한 문화학적인 접근을 선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여가와 문화의 관계에 관한 ‘학문교차적(cross-disciplinary)’접근을 통해 여가학을 새로운 학문분과로 체계화, 과학화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학제적 학문으로서 여가를 접근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으며 체계적인 방법론 도입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여가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학자, 문화예술인을 포함한 전문가들 사이의 활발한 토론과 산학협동이 가능하도록 문화생산의 네트워크를 마련할 것입니다.”라는 대목에서 학회의 지향점이 이론과 실천, 포름과 프로젝트가 아우러지는 열린 학회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이어령 상임고문의 글: 일하듯이 놀고 놀 듯이 일하는 사회와 잘 노는 사람들


지 금까지 우리는 일하는 법에 대한 훈련과 교육은 받았지만 삶을 즐기는 방법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배운 것이 없다. 그러나 21세기는 교육도 놀이로 하는 에듀테인먼트의 시대다. 우리는 월드컵이라는 역사적인 축제를 경험한 우리는 즐거움이라는 가치체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지 금까지 우리는 경제논리가 최우선시되는 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나 경제는 삶의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의식주가 족하지 않았던 시대에서는 언제나 금강산의 식후경 논리가 앞섰다. 모든 화두는 "그것이 밥 먹여 주느냐"라는 반문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 지만 21세기의 가치 패러다임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매력으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박물관과 유원지가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주 5일제 근무로 놀이가 노동 이상으로 중시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놀이는 소모적이고 파괴적이고 때로는 죄악시해 왔다.

그러나 공자님도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 樂之者)"고 가르치셨다. 라틴 말로 문명을 가리키는 시비리투스도 사람답게 산다는 의미라고 한다.

우 리는 너무나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 왔다.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준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그러나 환희 속에 진행된 월드컵을 통해 온 국민이 삶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요, 행복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체험했다. 이러한 체험이 한국인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지속되어야 한다.

진 정한 창조는 잘 노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이끌어 나갈 21세기에서는 노동과 여가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놀들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세상인 것이다. 여가·문화 학회는 21세기 한국사회를 이끌어 나갈 진정 “잘 노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리라 기대한다.


이어령 학회 상임고문의 글 “21 세기는 교육도 놀이로 하는 에듀테인먼트의 시대다. 우리는 월드컵이라는 역사적인 축제를 경험한 우리는 즐거움이라는 가치체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에서는 여가+오락+교육을 연결하는 이른바 “놀면서 공부하는 혹은 공부하면서 노는” 개념을 여가와 관련 짓고 있다. 우리는 여가에 대한 접근 중 ‘여가교육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 가교육학은 교육의 인지적 패러다임을 넘어선 경험과 체험의 장으로서 ‘교육’에 대한 영역을 의미한다. 더욱이 “진정한 창조는 잘 노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이끌어 나갈 21세기에서는 노동과 여가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놀들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세상인 것이다.” 에서는 교육과 여가의 관계에 노동과 여가에 대한 관계로 확대하고 있다. 놀이와 노동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보자면 노동경제학, 노동사회학 등의 학문적 기제가 여가경제학 혹은 여가사회학에도 투입될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3) 조동성 학회장 인사말


여가문화학회 회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여가문화학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조동성입니다.

여 러 회원님들이 성원해주신 덕분에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지난 6월 「2003 가족여가축제」를 성공리에 개최하였고, 가족여가축제 기간 중에 치루어진 연차학술 대회도 여러 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에 대해 청중들이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여 성황리에 마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가문화학회 학술지인 '여가학 연구' 창간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셨던 모든 분들께 모든 학회 회원의 이름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한 국여가문화학회가 창립된지 이제 겨우 1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성철, 문숙재 前 회장님, 이어령 고문님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기라성 같은 고문님들, 그리고 여러 이사님들과 회원님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한국여가문화학회는 600여명의 회원을 가진 명실상부한 '학회'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지게 되었습니다.

우 리 학회는 회원들의 것입니다. 회원 한 분 한 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 하고 싶은 활동을 다른 회원들과 나누고 함께 하는 장소가 바로 학회입니다. 이에 우리 학회가 앞으로 진행하게 될 모든 행사는 모든 회원들이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만들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회원들이 자신의 생각을 꾸밈없이 밝히고 이 내용이 모든 회원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될 수 있는 이메일, 홈페이지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우 리 학회는 여타 다른 학회에서는 볼 수 없는 차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학회는 교수와 대학원생이 중심이 되는 학자들의 집단입니다. 그러나 저희 학회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학술계 인사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 산업계, 정관계 인사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분들이 '여가와 문화'라는 코드를 매개로 모여있습니다.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로 구성된 우리 학회의 이러한 특징은 여타 어느 학회도 가지고 있지 못한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생각만을 가진 집단, 다양성이 없는 집단은 발전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러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우리 학회만의 장점을 어떻게 살리는가가 앞으로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이 「여가문화산업 전문인 30人 포럼」(가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포럼에는 국내 여가문화산업을 선도하는 기업의 CEO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의 건전하고 생산적인 여가문화와 여가산업을 진흥,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비 단 이러한 모임뿐만 아니라 학계, 문화예술계, 산업계 간의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소수 몇몇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앞으로 여러 회원님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리며, 본인 또한 미력하나마 한국여가문화학회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을 여러분들께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조 동성 회장의 인사말에서 한국여가문화학회의 방향성과 입장을 살펴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학회는 교수와 대학원생이 중심이 되는 학자들의 집단입니다. 그러나 저희 학회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학술계 인사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 산업계, 정관계 인사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분들이 '여가와 문화'라는 코드를 매개로 모여 있습니다.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로 구성된 우리 학회의 이러한 특징은 여타 어느 학회도 가지고 있지 못한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생각만을 가진 집단, 다양성이 없는 집단은 발전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열린 학회’ 나아가 ‘여가와 문화’를 코드로 하는 다양한 집단과의 교류와 공동 프로젝트를 시사하는 것이다.

 

‘2010년 세계여가총회 유치’, ‘여가도시로서의 춘천 프로젝트’, ‘여가정보관리사 인증제’ 등은 바로 관학, 산학 등의 연계 프로젝트인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의 여가학은 이론적인 포름과 실천작인 프로젝트가 엮어내는 실용 혹은 응용 인문과학으로서 그 위상을 정립해나가야 하며 여기 모인 콜로퀴움 참여자들은 이를 위해 이론과 실천 작업의 최전선에 서야 할 것이다.